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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 관용을 아는 다음세대를 양육해야 합니다!
고종율 (admin)    2011/01/03 13:24:02
아직도 우리는 혼돈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오랜 전통적 가치와 급작스러운 현대 문명의 가치, 유교 문화적 가치와 성경적 가치, 개인의 가치와 공동체의 가치 사이에서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바닷물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우리의 다음세대는 혼돈의 가치 속에서 자라나고 있습니다.
가끔 제가 살았던 미국에서 교포들 사이에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일학교에 어린아이가 새로 오면 이 아이가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통해 한국에서 갓 건너온 아이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오래된 미국 교민 교회에는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자란 아이와 미국에서 자란 아이는 당연히 차이가 납니다. 한국에서 갓 온 아이들일 경우,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특징,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 남이 보고 있을 때 잘하는 모습, 눈치를 잘 보는 것, 말을 재치있게(나쁘게 말하면 버릇없게) 하는 모습과 태도 그리고 공부를 요령으로 하려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모든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공감하며 아이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관용적이지 못하고 손해 보는 일에서는 약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인간으로서는 비겁하다고 할 수 있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이 됩니다. 아직 우리나라가 국력이 약하고, 많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살필 여유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우리들의 다음세대에게 관용을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 가르쳐도 20-30년 걸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관용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덕목(딛 3:2)인 동시에, 하늘의 지혜의 선물(약 3:17)이며, 다른 사람들(비기독교인도 포함되는)에게 보여주어야 할 성도의 성품입니다. 이를 위해 한 가지 오해를 없애야 합니다. 관용을 베풀면 손해를 본다고 하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관용을 강조합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하는’, ‘까다롭게 정확한 것을 의지적으로 요구하지 않는’ 등의 의미를 기초로 해서 나온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의 의미로만 본다면 관용의 가치를 가진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관용을 설명할 때, 위로부터 난 지혜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트리니티 신학교 교수인 무 박사(Dr. Moo)는 ‘하늘의 지혜로 동기부여되고 능력으로 입혀진 관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단순히 약한 것이 아닙니다. 또 오브라이언 박사(Dr. O'Brien)는 그의 빌립보서 주석에서 주께서 가까우심을 믿으면 당당히 관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견고한 기초 위에 나타난 자신감의 품성입니다. 성숙하다면 관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품을 줄 모르고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그리고 관용을 모르는 성인 사회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눈살 찌푸리고 바라보는 이 사회의 슬프고도 가슴 쓰린 단상들과 웃음, 여유가 없는 모습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온유함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주님의 성취를 뒤이어가는 우리들이 갖추고 보여주어야 할 견고한 모습, 관용을 가진 모습입니다.


_ 고종률 목사(파이디온 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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